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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를 찾아서 (Ⅱ)

종회장 金衡植(김형식)

1. 우리 민족의 기원

 # 우리 인류는 1만 년 전 파미르 고원 마고성(麻姑城)에서 기원하여 황궁씨가 북쪽 땅 천산주에서, 이동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정착해 살다가, 중국 북부와 몽골을 거쳐 중국 요동성을 근거지로 나라를 세웠으나, 연나라의 침입으로 남하하게 되어 태백산(묘향산)에 신시(神市)를 열고 단군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고조선(단군조선)은 한나라(한 무제)에 의해 또 다시 멸망하니, 그러나 고조선 유민들은 한나라에 끝까지 저항하여 잃어버린 고조선 땅을 다시 되찾아 그곳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남쪽에는 신라, 백제, 가야국을 세웠음이 우리 민족사의 정설로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2. 가락국(가야국)의 역사<구야, 가락, 가야, 금관가야, 본관가야 동일>

 #가야국은 서기 42년 3월부터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까지 현 김해 땅에 존재하면서, 벼농사를 짓고, 철기문화를 꽃피웠으며, 일본과 중국과도 교류를 했었다.

 #고조선의 멸망으로 북방에서 남하한 수로 집단은 김해와 함안 등 경남 남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이미 세력을 이루고 살던 9촌의 부족 집단과 융합하여 살면서 김수로 (시호 首陵) 집단을 중심으로 9간들과의 합의하에 구야국(가락국)을 세우고 주변 5개 소국(小國)들과 연합하여 가야연맹국을 만들었다.

 #가락연맹국은 6가야로,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합창,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으로 나뉘어, 김해 금관가야를 맹주국으로 삼아 통지되었다.

 # 수로왕은 호탕한 성격이시며 신라 석탈해의 도전도 과감히 물리쳐내신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이 인정되시었기에 금관가야의 왕(王)으로 추대되셨으며 6가야 연맹의 최고 통치자가 되신 것이다.

3. 수로왕의 후손들

 # 첫째 아드님을 거등왕, 둘째 아드님과 셋째 아드님도 김해허씨 나머지 7형제는 외삼촌 허보옥(보옥선사- 허 왕후 오빠)과 함께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에 들어가시어 신선술을 배우고 살았는데, 그곳이 현재 경남 하동군 화계면 쌍계사 윗쪽 칠불암이다. 이후 수로왕은 아들 7형제를 불러들여 일본 '구주'로 건너가게 하여 각기 나라를 세우게 하였으니, 그곳이 곧 '임나가야'라고 전한다. 지금도 그 후손의 세(勢)가 남아 있는 곳이 일본 서남단 '가고시마'이다.

 # 수로왕의 뒤를 이은 8대왕 질지왕은 불교문화를 가야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신 분이시며, 할머니 허 왕후께서 거처하시던 곳에 '왕후사(王后寺)'도 지으셨다.

 # 10대 양왕(구형왕)은 신라의 집요한 침략에 못 견디어 나라보다 백성을 구하고자 결단을 내리시고 신라에 항복, 가야를 신라에 병합해주셨다.

4. 허왕후(보주태후)는 누구이신가?

 # 허 왕후(황옥)는 인도 아요타국 공주로서, 1세기에 북방 월씨(月氏)가 아요타국을 지배하면서 멸망하게 되니, 지배층들이 쫓기어 중국 사천성 보주지방에 있던 촉나라로 들어가 살다가 서기 47년 허황옥 일족들이 촉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또 다시 쫓김을 당하게 되니, 중국 양자강을 타고 상해를 거쳐 표류하다가 48년 마침내 김해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김병모 박사 주장) 그러나 한사군(낙랑군) 설치이후 고조선 사람들이 김해로 집단 남하해온 세력으로, 수로집단의 주도로 가락국을 세웠다는 주장이다. (김병기 박사 주장)

 # 그리하여 수로왕은 재위 생년만에 허왕옥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10남 2녀를 두시었다.

 # 수로왕은 10남 중 첫째를 도왕(거등왕)으로 대를 잇게 하였고, 2남과 3남은 허왕후의 성을 잇게 하여 그 손이 허씨요, 또 허씨의 손이 인천 이씨가 되어 가락 후손으로 발전, (가락김씨)운명을 같이해왔다. 이를 미루어보건데, 가야에서 허 왕후 집단의 세력이 대단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아들 둘에게 허씨 사성을 했다는 것).

5. 신라와 가락 김씨들

 # 신라 법흥왕은 가야국 구형왕(양왕)에게 가야연맹 맹주국 왕으로 예우를 다하였으며, 본국(가야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고 상등의 진골 신분 위계를 주어 신라 신 김씨로 등장시켰으나 구형왕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옥산에서 칩거하시다 세거하셨다.

 # 우리 시중공 손은 양왕(구형왕)의 셋째아들 김무력 장군, 그리고 손자 김서현 장군, 증손자 김유신 장군의 직계손으로, ▲김무력 선조는 법흥왕비 친정 동생과 결혼 ▲김서현 선조는 진흥왕의 질녀와 결혼 ▲ 김유신 선조는 태종 무열왕의 딸과 결혼 ▲김문희 선조는 김춘추와 결혼(태종 무열왕의 아내요, 문무대왕의 어머니)시키는 등 가락 김씨에게 유화책을 써서 신라와 동화시키고 왕권을 굳게 다지어 마침내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 김유신 장군은 사후 162년(흥덕대왕)만에 흥무대왕에 추봉되셨지만, 가야김씨의 세도에 신라인으로부터 질시를 받아 신라 31대 신문왕은 장인인 김흠돌 선조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김유신(흥무대왕) 전기를 쓰신 증손 장청(長菁) 선조를 참형하였으며, 진골 신분을 박탈하고 식읍과 관료전을 폐지하는 등 우리 가락 김씨는 신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이로부터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6. 고려국과 가야김씨

 # 수로왕 23세손 김상좌(金常佐) 선조께서 신라 51대 진성여왕의 아들 궁예를 따라 복지겸(卜智謙),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과 함께 태봉국과 고려국 개창에 주역이 되시었다.

    ※ 김상좌 선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시었고, 고려 개국공신인 대장군 복지겸의 사위다.

    ※ 김호(金浩) 선조: 김상좌 선조의 아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사위다.

 # 우리는 고려사회에서 위계와 기반을 새로이 구축하게 되었다.

 # 중요 인물로는 김원현(金元鉉) 장군, 김목겸 삼중대광, 김구년(金龜年) 일직부사, 김보(金普) 좌정승, 김유(金庾) 명장, 김란(金蘭) 밀직부사, 김저(金佇) 대호군(최영 장군 생질), 김탁(金琢) 문하시랑 외에 김진문, 김불비(金不比), 김휴, 김영택, 김만희, 김영국, 김준, 김병여, 김은, 김장엄 등은 예의판서로 19명이 요직에 계셨다. 김저(金佇) 조상께서, 고려 32대 왕에서 퇴위되어 여흥에서 유배 중인 우왕의 밀명을 받고 이성계를 척살하려다가 곽충보의 배신으로 탄로되어 화를 면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락 김씨가 이씨조선에 들어서면서 또다시 새로운 비운의 갈림길에 처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

- 이종욱 지음 '한국의 초기 국가'(1999.2.25.)

- 김경복, 이희근 지음 '이야기 가야사'(2001.6.)

- 김병기 지음 '가락국의 후예들'(2008.4.)

- 김병모 지음 '고고학 여행'(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