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age1.jpg
  • image2.jpg
  • image3.jpg
  • image4.jpg
  • image5.jpg
  • image6.jpg


문중인물
작성자 총무이사
작성일 2017-03-10 (금) 11:03
ㆍ추천: 0  ㆍ조회: 2627      
IP: 220.xxx.245
판서공 諱 好仁(贈 吏曹判書 行 濟州牧使) 實記
     
           

好仁(贈 吏曹判書 行 濟州牧使)

        

字는 乃克이요, 號는 秋潭,梅巖이며 吏曹判書(정2품)에 추증 되었다.

公은 1420년 평동 복룡산하 기곡 용강(龍崗)에서 태어나서 암헌 申檣(신장)의 문하에서 공부하시고 말과 행동이 법도가 있으시고 문,무에 재능이 있스셨으며,지조와 청렴이 있으셨다.

세종(世宗) 20년(1438) 무오(戊午) 생원시(生員試)에 서거정,신숙주등과 함께 합격하고 敎導생활 하시다가

문종 즉위년 (145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2위로 홍윤성등과 동방 급제(同榜及第)를 하셨다.

단종 1년 1453년癸酉 3월5일 두 번째 기사에 는 승문원(承文院)의

저작(著作;정8품)김호인이 동방급제한 홍윤성 에게 羅州에서 봉변을 당하였고 사간원에서 이를 문제삼아 홍윤성의 감찰 인선(人選)에 서명을 거부하였다.



조1년 1455 을해 12월 27일(무진) 3번째기사 에는 의정부에 전지하여 현감(縣監종6품)김호인 등을 원종 공신2등에 녹훈하다

2등에게는 각각 1자급을 더해 주고 자손을 음직을 받게 하고, 후세에까지 유죄(宥罪)하고,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자원에 따라 산관 1자급(資級)을 더하여 준다. 그 가운데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형제·사위·조카 중에서 자원에 따라 산관 1자급을 더하여 준다



세조 12권, 4년(1458 무인 ) 4월 20일(정축) 2번째기사 문신 중 활을 잘 쏘는 자를 불러 쏘게 하고 봉례(奉禮정4품) 김호인등이 들어와 활을 쏘았다



1459년 신숙주는 보한제집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이시로 미루어 보아 호인공은 이무렵에 부친 수연공이 6진을 개척했던 함길도지역에서 야인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제(題) : 천순 기묘년 봄 天順己卯春

(보한제집5권七言小詩)



天順己卯春 承命行邊 安集野人 到穩城

천순 기묘년 봄소명을 받들고 변방을 순행하면서

야인들을 안집 시키기 위해 온성에 도착 하였다



待遠人未至 留數日

거기 먼데서 오는 사람을 기다렸스나 오지 않음으로 수일간 머물렀다



城新移館舍開明 心且安焉

새로옮긴 관사의 전경이 창명 하므로 마음이 느긋 하였다



時從事康公孝文 兵使首領金公好仁從僕 皆同年也

이때 종사 강공 효문과 병사 수령 김공 호인이 복을 수행 했는데

이들은 모두 동년 이였다.



主人僉制 亦於僕爲同年 同年四人 不期而會 眞大奇事

주인 첨 절제 역시 복의 동년 이였스니 동년 4인이 기약도 없아 한자리에 모인 샘이라 참으로 매우 기이한 일이였다.



於是吟兩絕破閑 三公亦各有和

이리하여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절구 2수를 지었는데 3인의 동년도 각기 화답 하였다



月晦 在慶源 而林公糊爲軸 以爲後日觀 亦大好事也

그달 그믐에는 경원에 있었는데 임공 호가 이를 축으로 만들어

뒷날의 볼거리로 삼게 하였스니 역시 매우 아름다운 일이 였다



又用其韻 題一絕以歸之

이제 또 그때의 운으로 절구 한수를 지어 보낸다



세조 19권, 6년(1460 경진) 1월 28일(병오) 4번째기사

세조는 함길도에서 적은 숫자로써 많은 적을 제어(制御)하여 승리를 거두고 적을 북쪽으로 몰아내어 위세(威勢)를 삭방(朔方)에 떨치고 와서 수급(首級 )을 바치니, 나라의 간성(干城)이라 이를만하다 하고 경력(經歷) 김호인(金好仁)등에게 각각 표리(表裏) 1벌을 내려 주게 하다.



세조 19권, 6년(1460 경진) 3월 1일(무인) 1번째기사모리안(毛里安)에사는 올량합(兀良哈) 아아두(阿兒豆)가 오치안(吾治安)·벌인(伐引) 등지의 적(賊) 1백여 인을 거느리고, 2월 18일에 발병(發兵)하여 침범하므로, 2월 24일 함길도 경성(鏡城)에서 경력(經歷) 김호인(金好仁)등이 현지의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추격(追擊)하여 수급(首級) 26급(級)을 배고 말10여 필(匹)을 빼앗았스며. 이 싸움에서 아비거(阿比車)의 죽음을 알리다



세조 23권, 7년(1461 신사 ) 1월 29일(경오) 4번째기사

전라좌도 경차관(全羅左道敬差官) 김호인(金好仁)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옥과현(玉果縣)의 응모인(應募人) 이백손(李伯孫)이 그 아내 천종(千從)이 죽자 그 아우 종이(從伊)와 간통하여고 아내로 삼았으니, 그 행위가 마치 금수(禽獸)와 같아서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또 종[奴子]의 수효를 헛소문 내어 응모함으로써 국가를 기만하였으니, 간사(姦詐)함이 심하여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백손은 공신(功臣)이므로 죄를 다스릴 수 없으니, 청컨대 양계(兩界)의 잔역리(殘驛吏)에 속하게 하여 그 죄악을 징계하소서. 또 종이는 그 음란하고 추함이 비길 바 없으니, 유사(宥赦) 전을 논하지 말고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24권, 7년(1461 신사 / 명 천순(天順) 5년) 6월 6일(을해) 1번째기사 및 6월 15일(갑신) 1번째기사를 보면 북청 부사(北靑府使;종3품) 김호인은 힘길도 본부군사 및 홍원(洪原)·이성(利城)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이 갑산군(甲山郡)굴정(掘井) 들에 둔(屯)을 치므로 구원(救援) 하였으며, 갑산군사(甲山郡事) 정희문(鄭希文)은 미리 변이 있을 것을 알았으면서도 후망을 갖추지 않고 사람과 말로 하여금 다 성밖으로 나가 풀을 베게 하여, 갑자기 적으로부터 죽임과 노략질을 당하고 말 70여필을 잃은데대한 책임을 물어 이성(利城)에 가두자 임시로 갑산 군사(甲山郡事)를 겸하였다



서거정은 다음과 같은 시를 이때 남긴다. (사가집에서)

마천(麻川)의 운을 사용하여, 북청(北靑)에 부임하는 김 동년(金同年) 호인(好仁) 을 보내고, 겸하여 강 원융(康元戎)에게 부치다. 2수


 

북궐에서 새로운 명을 받들고 / 北闕銜新命

동주에 장대한 뜻 펼치러 나가네 / 東州展壯圖

관리의 재능은 진작 강개했는데 / 吏才曾慷慨

장수의 지략은 또한 호쾌하구려 / 將略轉豪麤

어느 시대인들 황패가 없으리오 / 何代無黃霸

그대의 전신은 바로 주아부로세 / 前身是亞夫

직무를 보고 응당 여가가 있거든 / 簿書應有暇

술자리에서 다시 투호도 즐기리 / 樽俎更投壺


 

나는 쇠하여 장대한 뜻 어긋났지만 / 吾衰違壯志

자네는 가니 훌륭한 계책 아까워라 / 子去惜良圖

문무의 재능을 겸하여 갖췄으니 / 文武才兼備

장이의 도가 추솔하지 않을 걸세 / 張弛道不麤

성주께서 어진 장수 생각하시니 / 聖主思良將

원수는 백 명 가운데 뛰어나도다 / 元戎特百夫

그대 빙자해 번거로이 묻노니 / 憑君煩問訊

언제나 함께 술잔을 기울여볼꼬 / 何日共傾壺



세조 47권, 14년(1468 무자) 7월 30일(정해) 3번째기사

호군(行護軍) 김호인(金好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으로 하여금 전지(傳旨)하게 하기를,

“잘 돌아와서 심히 기쁘다.”

하고, 이어서 도주(島主)가 관대(館待)한 여러 가지 일을 물으니, 김호인이 대답하기를,

“도주(島主)가 성상의 덕(德)에 깊이 감사하여 신(臣)을 심히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여 이르는 곳마다 주찬(酒饌)을 베풀어 위로하였습니다. 또 신(臣)을 위하여 사냥을 하였는데, 신을 따르던 자가 달리는 사슴을 쏘아 죽였으므로 도인(島人)들이 모두 탄복(歎服)하였습니다. 그들의 풍속에는 가죽신[鞋]은 없고 항상 나막신[木屐]을 신고 다니는데, 도주가 신이 이르는 것을 바라보고는 나막신을 벗고 와서 맞이하였으며, 신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 형제(兄弟)와 족친(族親)이 도주와 함께 잇달아 앉았으며 무릇 찬구(饌具)와 수작(酬酢)하는 예(禮)가 도주와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도주가 거처(居處)하는 곳은 대나무 집[竹室] 3간(間)이었으며, 성곽(城郭)과 궁실(宮室)도 없고, 또한 예의(禮儀)도 없었습니다.”

또한 사물(賜物)을 전하였을 때에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도주(島主)가 청사(廳事)의 섬돌 아래에서 공손히 맞이하였다. 사인(使人)이 서계(書契)를 받들어 도주의 집 청사 북쪽에 놓으면, 도주가 사배(四拜)를 행하였다“하였다.



성종 2권, 1년(1470 경인) 1월 14일(계사) 6번째기사예조에서 대마주 수호 대관 종성준의 사신을 접대하여 줄 것을 청하니 대마주(對馬州) 경차관(敬差官정3품) 김호인(金好仁)이 와서 말하기를, ‘도주(島主) 종정국이 나에게 말하기를, 「종성준은 곧 동복형(同腹兄)이다.하였으니, 사선(使船)을 접대하기 바랍니다.’하니 이에 따르다



성종 56권, 6년(1475 을미) 6월 4일(신사) 1번째기사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문제에 관해 신하들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성종 64권, 7년(1476 병신) 12년) 2월 12일(병술) 7번째기사원상 한명회의 건의에 따라 대마도 선위사 김자정에게 임시 직함을 임명케 하는 과정에서

성종 103권, 10년(1479 기해) 4월 1일(정해) 4번째기사예조에서 대마 도주에게 보내는 하사품과 서계에 대해 아뢰는 과정에서 호인공의 대마도 치위관으로서 사례를 근간으로 삼았다.





1468년 세조 14년 무자 7월 30일  휘 호인 께서 대마도 경차관으로 돌아와 복명을 하고, 그이듬해 예종1년 1469년 윤2월 제주목사로 떠나는데 대한 신숙주의 보한제집에 나온 글이다.


 

送金同年好仁安撫濟州序(송 동년 호인 안무제주서)

제주는 곧 옛 탐라국이다. 남해 가운데 아주 멀리 있어서 수백리 되는 바다를 항해 해야만 이를 수 있스며 ,기이한 물자와 해산물이 생산되어 상선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해적들이 횡행하여 문무를 겸비한 큰 인물이 아니면 다스릴 수 없으므로, 번번히 조정에서 훌륭한 분을 선발하여 가서 진무하도록 하고 있다.

나의 동년 김군 호인이 선발에 응하여 떠나면서 작별을 고하고 글을 청하였다.


 

<나는 들으니, 정치를 하는데는 관대함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룬 뒤에야 위엄과 은혜가 아울어 드러나고, 내치가 잘 닦여진 연후에야 외침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관대하기만 하고 엄격하지 못하면 그 정치는 절제를 잃게 되고, 엄격하기만 하고 관대함이 없으면 그 정치는 가혹해 지나니, 절제 없슴과 가혹함은 바른 정치가 아니며, 내치가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외침을 막을 수 있겠는가.


 

제주는 원나라 말기부터 말을 방목하고 관리를 주둔시켜서 난리를 피할 계책을 세워 놓았스며, 몽고족과 한족이 뒤섞여 살면서 험지임을 믿고배반을 거듭하다가,우리왕조(조선조)에 이르러 여러 성군들의 따사롭게 어루만지는 은혜를 입어, 백성은 감화를 받아 평온해 졌고, 마음으로 복종해서 동화 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수 없이 모여들고, 토착민과 외지 사람들이 뒤섞여 있스며, 토지는 메마르고 백성들은 가난하여, 전해 내려오는 야만스러운 습속이 아직도 남아 있스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한결같이 사납게만 대하면 남아 나지를 못할 것이요, 사나운 풍습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관대 하게만 대한다면 제압할 수 가 없을 것이니, 관후함과 엄격함을 조화시킬 수 없다면, 백성들이 어느 곳에 의지할 수 있스랴. 더구나 제주는 서쪽으로 가면 중국의 明州와 만나고 동으로 가면 일본의 욱주(旭州 ;九州)와 만나며,

남으로는 유구(琉球)의 여러 섬과  통하므로, 해적들이 출몰하지만 바다 밖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때에 구원하기가 어려우니, 이는 반드시 인화를 이룩한 연후에야 외침을 방어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니, 적임자라고 일컬어질 만한 사람이라면 어찌 문무를 겸비한 큰 인물이 아니겠는가, 조정에서 유능한 사람을 선발하면서 그대를 택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지난해 봄에 대마도주가 새로 서니 국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죽은 島主를 조상하고 새 도주를 축하하려 하였지만 적임자를 고르기가 어려웠고, 바다는 험하고 풍속은 사나와서 사람들이 또한 가기를 싫어하여 거짓 병을 핑게삼아 피하는 사람까지 있었는데, 군은 명을 받자 곧 떠나서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고 돌아 왔는데, 이제 또 멀리 바다 밖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싫어하는 빛이 없으니, 가히 道에 통달하고 왕명에 순종하는 훌륭한 군자라 이를만 하니, 관후함과 엄격함을 조화시킴에 무슨 어려움이 잇스랴. 그들을 편안하게 어루만져서 민심을 진정시키고 내치를 잘 해서 외침을 막을 수 있을 것임을 예측 할 수 있도다.


 

일찌기 들으니 한라산이 고을 가운데 있어서 지극히 높으며, 산에는 기이한 나무가 있어서 햇볕이 쨍쨍 쪼이면 향기가 산에 가득하고, 산 정상에 매우 기이한 연못이 잇스며, 올라가서 바라모면 사방의 검푸른 물결이 하늘과 잇닿았고, 정북쪽 호남 지방의 산들이 구름 밖에 은은히 드러나서, 진실로 경치가 좋은 곳이므로 세상에서 신선이 사는 봉래(蓬萊나 영주(瀛洲) 라 칭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져서 여가가 많게 되면 나를 위해 한번 등산하여 유적과 경치를 적어 보내서 작별을 슬퍼하는 내 마음을 달래 주시라.


 

대하는 이군(李君)도 또한 동년이니 안부를 전해 주고, 교대를 위하여 빚은 술이 이제 익었을 것이요, 농사를 독려할 일들이 매우 많을 것이니, 지체 없이 떠나는 것이 좋을듯 하네.>



題 次琴以詠韻 送金濟州好仁

금이영의 시운을 달아 제주안무사 김호인을 전송하다.



현명한이 등용되고 여론 또한 공정하여 朝著推賢物論公。

만리 청운에 기러기의 뒤 따르게 되었네 靑雲萬里逐冥鴻。

다진 역량이 이제서야 시험할 기회이니 盤根利器今應試。

꽃다운 이름 널리 전파해 다오 好播芳名惹大東。인생의 만나고 헤어짐은 하늘의 이치 人生南北屬天公。

한척의 외로운배 기러기처럼 떠나 가네 一片孤帆雲外鴻。

다른 벗들 죽어가고 그대마저 멀리가니 故舊彫零君 又遠。

봄바람 석별의 정이 동녘하늘에 가득 하구나. 春風離思滿天東。



서거정은 사가집에서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 동년(金同年) 호인(好仁) 을 보내다.


 

해상의 신산을 여섯 자라가 지고 있기에 / 海上神山負六鼇

동풍이 흥을 재촉해 목란 배에 오르누나 / 東風催興上蘭橈

땅은 선도와 연접해 살기 좋은 고장이요 / 地連仙島人居勝

공물은 천조에 바쳐라 물산도 풍부하네 / 貢入天朝物産饒

명마는 이미 대완의 요뇨보다 낫거니와 / 名驥已過宛腰褭

감귤은 한의 포도보다 훨씬 맛 좋고말고</f

    N       조회
1
부사공 김세상 선조 기록(무안군지)
무안군지 무안출신 급제자 명단 (사마) 김적 나주 진사 월강 대경의 후 명종 노몽호 함평 진사 진사성지의 손 김혁 고성 진사 찰제 명의 사 홍진 남양 진사 문정공 언박의 후 노검세 함평 진사 진사 성지의 후 김원 나주 진사 제용점 수남의 자 김세상 김해 진사 호조좌랑 증형판 서간 이천 생원 진사 설의 제..
2399
2
지역 선조(선현) 기록
우리 종중 소속의 각 지역 선조(선현)의 기록을 파일형태로 올립니다.  *참고문헌: 각 군지 및 읍지
2192
3
용만공 김우윤 선조 기록
용강공 김우윤(金友尹) 국조방목 기록 세정 - 효검 - 우윤 김우윤(金友尹) ?∼1597(선조 30)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지임(之任), 호는 용만(龍灣)이며 효검(孝儉)의 아들이다. 1572년 별시에서 병과로 급제,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공조좌랑에 오른 후 영광에 거주하는 노비 정세(正世)가 강..
2366
4
현포 김석구(현화문중)
현포(玄圃) 김석구(金錫龜)   1653년(효종 4)∼1718년(숙종 44).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몽뢰(夢賚)이고, 호는 현포(玄圃)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월천리(月天里)에서 태어났다. 중조(中祖)인 신암(愼菴) 김탁(金琢)은 벼슬이 도첨의(都僉議)와 좌시중(左侍中)에 이르렀다. 이름을 남긴..
2309
5
중시조 시중공 휘 탁
* 中祖 諱 琢 주요 관직) 副使(정5품), 提學(정3품), 知省事(종2품), 大提學(정2품), 정당문학(종2품),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都僉議門下侍中(도첨의문하시중,종1품, 현 부총리) 중조께서는 가락국 金首路王을 始祖로 하고 삼한공신 흥무대왕 김유신을 中始祖로 하는 遠孫이시다. 중조의 妃(비)는 진위이(振威李)씨로 찬성..
2827
6
충숙공 휘 수연조의 4군6진 개척
4군 6진의 개척 |4세 충숙공 諱 壽延 자료실 石汝(김기일) | 등급변경▼준회원정회원우수회원특별회원 | 조회 111 |추천 0 |2010.10.08. 23:41 http://cafe.daum.net/sijung-gong/SIdE/11  .bbs_contents p{margin:0px;} ..
3122
7
조선왕조실록에서의 金壽延 2
            .bbs_contents p{margin:0px;} 세종 102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2월 10일(경인) 1번째기사 보청포 싸움에서 공을 세운 김한생·조성길·김삼우 등에게 상을 내리다 대호군(大護軍) 김연지(金連枝)가 함길도에서 돌아와 아..
2704
8
조선왕조실록에서의 金壽延 1
        .bbs_contents p{margin:0px;}  세종 63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3월 9일(병술) 3번째기사 문과에서 최항 등 25명과 무과에서 김수연 등 10명을 선발하다  문과에서 최항(崔恒) 등 25명과 무과에서 김수연(金壽延) 등 10명을 선..
2585
9
忠肅公 諱 壽延(同知中樞院使 贈 兵曹判書) 實記
            .bbs_contents p{margin:0px;}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 증(贈)병조판서 충숙공 휘 壽延 實記                        충숙공 께서는  1405년 나주 관동면 복룡산..
2450
10
조선왕조실록에서 판서공 휘 好仁 2
|5세 이조판서 諱好仁 자료실 감탱이(김기일) | 등급변경▼준회원정회원우수회원특별회원 | 조회 25 |추천 0 |2010.06.17. 22:51 http://cafe.daum.net/sijung-gong/SIdI/2  .bbs_contents p{margin:0px;} 세조..
3225
11
조선왕조실록에서 판서공 휘 好仁 1
       .bbs_contents p{margin:0px;}  단종 5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3월 5일(임술) 2번째기사 사간원에서 홍윤성의 감찰 제수에 서경하지 않은 이유를 아뢰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홍윤성(洪允成)이 지난번에 사복시(司僕寺)의 직..
2521
12
판서공 諱 好仁(贈 吏曹判書 行 濟州牧使) 實記
                  .bbs_contents p{margin:0px;} 諱 好仁(贈 吏曹判書 行 濟州牧使)          字는 乃克이요, 號는 秋潭,梅巖이며 吏曹判書(정2품)에 추증 되었다. 公은 1420년 평동 복룡산하 기곡 용강(龍崗)에서 태어나서 암헌 ..
262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