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군 6진의 개척
4군은 조선 세종 때 서북 방면의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 요지로서 여연 · 자성 · 무창 · 우예를 말한다. 1416년(태종 16) 중강진 부근에 여연군을 설치하였고, 1433년(세종 15) 최윤덕을 평안도도절제사로 삼아 여진을 정벌하고, 강계부와 여연군의 중간 지역에 성을 쌓고 자성군을 설치하였다. 1443년(세종 25) 여연군 동방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을 설치하였고, 여연 ·자성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에 우예군을 설치하였다.
1435년1월18일에 평안도 감사가 급이 아뢰기를 여진족 2700여 기병이 여연성을 포위하였다 함으로 공은 도안무사 군관 김수연은 군수 김윤수등 여러군인들과 성 위에서 대치하면서 싸워 적90여명과 말60여필을 사살하고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여 패주 시켰다.
6진은 조선 세종 때 동북 방면 여진족 침입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 지역에 설치한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의 진을 말한다. 이 방면의 개척은 고려 말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삭방도만호겸병마사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태종 때 경원 ·경성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족과 교역하였으나 여진족 등의 내습이 잦아지자 부령 이북은 여진족에게 방치되었다.
1433년(세종 15) 여진족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북진 정책에 나섰다. 이듬해 6진의 설치를 시작하는데, 김수연은세종21년(1439)에는 지경흥군사(知慶興郡事)로, 세종25년(1443)에는 보청포싸움에서 상호군으로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1449년(세종 31) 훈융(경원 북방)에서 독산 연대(회령 서방)까지 장성을 쌓고 석막에 부령부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그 뒤 여진족은 서방쪽으로 이주하였고, 6진에 각도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개척함으로써 조선의 영역은 장성 밖 일부 지역을 제외한 두만킁 이남 전역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