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mage1.jpg
  • image2.jpg
  • image3.jpg
  • image4.jpg
  • image5.jpg
  • image6.jpg


문중인물
작성자 총무이사
작성일 2017-03-10 (금) 11:12
ㆍ추천: 0  ㆍ조회: 2705      
IP: 220.xxx.245
조선왕조실록에서의 金壽延 2
           
세종 102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2월 10일(경인) 1번째기사
보청포 싸움에서 공을 세운 김한생·조성길·김삼우 등에게 상을 내리다

 
대호군(大護軍) 김연지(金連枝)함길도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보청포(甫淸浦) 싸움에 전 부거현사(富居縣事) 김한생(金漢生)은 홀로 극문(棘門)3665) 을 지키어 몸에 세 화살을 맞고 힘껏 싸워 추격하였으며, 경력(經歷) 한서룡(韓瑞龍)·상호군(上護軍) 김수연(金壽延)·천호(千戶) 김삼우(金三雨)동관(童關)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연달아 이르니, 적이 퇴각하므로 삼우(三雨)사직(司直) 조성길(趙成吉)·최온지(崔溫之), 부사직(副司直) 백옥경(白玉瓊)·김복례(金復禮) 등이 추격하여 적 5명을 베이매, 사졸이 이긴 기세를 타서 패하여 달아나는 적을 쫓았으니 실로 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연(壽延)·서룡(瑞龍)은 미리 적의 꾀를 알고서도 곧 달려오지 않았으니 함께 죄가 있사옵니다.”
하니, 의정부에 내려 병조와 더불어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한생(漢生)·성길(成吉)·삼우(三雨)·온지(溫之)·옥경(玉瓊)·복례(復禮) 등 여섯 사람은 공이 제일이니, 마땅히 3급(級)을 뛰어 벼슬로 상주고, 군사 김수강(金守剛) 등 80인은 두 자급을 뛰어 벼슬로 상주며, 김귀로(金貴輅) 등 83인은 한 자급을 뛰어 상주소서. 김인경(金仁景) 등 72인은 자급을 올리게 하되, 서룡수연은 공과 허물이 서로 맞먹으니, 상도 주지 말고 죄도 주지 않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고, 우찬성 황보인(皇甫仁)은 의논하기를,
“두 사람이 비록 죄가 있으나 또한 공도 있으니, 마땅히 하등을 따라 상을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서룡·수연도 또한 한 자급을 올리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책 529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세종 117권, 29년(1447 정묘 / 명 정통(正統) 12년) 7월 1일(신묘) 2번째기사
이영·권공·윤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영(李瓔)으로 화의군(和義君)을, 권공(權恭)으로 봉헌 대부(奉憲大夫)를, 윤번(尹璠)으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이맹진(李孟畛)·성염조(成念祖)로 함께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김세민(金世敏)으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이사임(李思任)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양후(楊厚)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하한(河漢)으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이심(李審)으로 인순부 윤(仁順府尹)을, 김조(金銚)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신자근(申自謹)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정척(鄭陟)으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안진(安進)으로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조수량(趙遂良)으로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임효신(任孝信)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조순생(趙順生)·봉안국(奉安國)·김수연(金壽延)으로 모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원자직(元自直)으로 수 사헌 장령(守司憲掌令)을, 김담(金淡)으로 수 사간원 우헌납(守司諫院右獻納)을, 조혜(趙惠)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권맹손(權孟孫)으로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민공(閔恭)으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기건(奇虔)으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성봉조(成奉祖)경상우도 도절제사(慶尙右道都節制使)를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5책 2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종친(宗親)
 
세종 126권, 31년(1449 기사 / 명 정통(正統) 14년) 12월 26일(임신) 1번째기사
정분·이견기·윤형·조혜 등 제 관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분(鄭苯)의정부 좌참찬 겸 판이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吏曹事)로, 이견기(李堅基)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윤형(尹炯)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조혜(趙惠)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정인지(鄭麟趾)공조 판서(公曹判書)로, 이선(李渲)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김효성(金孝誠)·이균실(李均實)·홍약(洪約)을 모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권맹손(權孟孫)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기건(奇虔)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조서안(趙瑞安)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신기(愼幾)호조 참의(戶曹參議)로, 민공(閔恭)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정이한(鄭而漢)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임효신(任孝信)·김수연(金壽延)·하결(河潔)을 모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조극관(趙克寬)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성봉조(成奉祖)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박중림(朴仲林)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로, 이인손(李仁孫)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이사원(李師元)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다. 기건은 행수(行首)에서 출신하여 중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이간(吏幹)4399) 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제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로서 들어와 호조 참판이 되었으나, 그가 전라도에서 재임 중에 매우 청렴하지 못하다고 이름이 있었고, 정이한은 양계(兩界)에서 성을 쌓은 공로로서 차례를 무시하고 서용(敍用)하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5책 154면
 
문종 2권,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7월 6일(무신) 1번째기사
이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신미에게 승직을 제수하다
 
이채(李宷)를 흥록 대부(興祿大夫) 의성군(誼城君)으로, 박종우(朴從愚)를 성록 대부(成祿大夫)로, 정종(鄭悰)을 숭덕 대부(崇德大夫)로, 김종서(金宗瑞)를 숭록 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정분(鄭苯)을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겸 판이조사(兼判吏曹事)로, 최사의(崔士儀)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이천(李蕆)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정인지(鄭麟趾)를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권맹손(權孟孫)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선(李渲)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양(李穰)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황치신(黃致身)·김청(金聽)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이견기(李堅基)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안진(安進)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이사철(李思哲)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기건(奇虔)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안완경(安完慶)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선제(李先齊)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이사순(李師純)을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황수신(黃守身)·김자옹(金自雍)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조석강(趙石岡)·성승(成勝)·신자근(申自謹)·박호문(朴好問)·유익명(兪益明)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로, 이심(李審)을 인순부 윤(仁順府尹)으로, 임효신(任孝信)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이계전(李季甸)을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김완지(金俒之)를 좌승지(左承旨)로, 정이한(鄭而漢)을 우승지(右承旨)로, 정창손(鄭昌孫)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김문기(金文起)를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이숭지(李崇之)를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윤은(尹殷)·이종목(李宗睦)·김원(金元)·박효함(朴孝諴)·성급(成扱)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이영구(李英耉)를 사헌 지평(司憲持平)으로, 조서안(趙瑞安)을 황해도 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로, 신숙청(辛俶晴)을 경상 우도 병마 절제사(慶尙右道兵馬節制使)로, 남우량(南佑良)을 경상좌도 수군 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로, 이사임(李思任)을 경상우도 수군 처치사(慶尙右道水軍處置使)로, 권맹경(權孟慶)을 전라도 수군 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로, 유강(柳江)을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로, 김유양(金有讓)을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로, 김수연(金壽延)을 판삭주도호부사(判朔州都護府事)로 삼고, 또 중[僧] 신미(信眉)를 선교종 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 존자(慧覺尊者)로 삼고, 금란지(金鸞紙)에 관교(官敎)를 써서 자초폭(紫綃幅)으로 싸서 사람을 보내어 주었는데, 우리 국조(國朝) 이래로 이러한 승직(僧職)이 없었다. 임금이 이 직을 주고자 하여 일찍이 정부(政府)에 의논하고, 정부에서 순종하여 이의가 없으므로 마침내 봉작(封爵)하게 되었는데,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박종우(朴從愚)가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불사(佛事)를 의논할 때, 말이 매우 간절하고 정직하였다. 임금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박종우가 무엇을 안다고 이같이 말하는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부의 직책을 파하고 정1품을 주었다. 정분(鄭苯)은 반차가 정인지(鄭麟趾)의 아래에 있었는데, 뛰어서 찬성(贊成)을 제수하니, 사론(士論)이 좋지 못하였다. 이천(李蕆)은 무예(武藝)로 일어나 성품이 매우 정밀 교묘하여, 오래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가 되었는데, 뇌물을 많이 받아들이므로 세종(世宗)께서 듣고 드디어 제조(提調)를 갈았으나 무릇 교묘한 일에 관계되는 것은 이천에게 명하여 감독 주장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대우가 높았으며, 세종(世宗)소헌 왕후(昭憲王后)의 산릉(山陵)을 쓸 때에 모두 제조가 되었고, 이때에 이르러 승진하여 1품에 제수되었다. 이사철(李思哲)은 오래 도승지(都承旨)로 있었는데, 뛰어서 가정(嘉靖)을 제수하였고, 김원(金元)신빈(愼嬪)의 아비인데, 특히 병조(兵曹)에 명하여 입직(入直)은 시키지 말고 순작(巡綽)으로 수반(隨班)하게 하였다. 박효함(朴孝諴)윤은(尹殷)은 불사(佛寺)를 영선(營繕)한 공로로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또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山陵) 세 도감(都監)과 수기(壽器)를 맡은 자에게 모두 한 자급(資級)씩 올려 주었다. 임금이 장차 세자(世子)를 봉하려고 하여 황보인(皇甫仁)을 사(師)로 삼고, 정갑손(鄭甲孫)·권맹손(權孟孫)·허후(許詡)·이선제(李先齊)를 빈객(賓客)으로 삼고, 또 박팽년(朴彭年)을 보덕(輔德)으로 삼고, 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을 필선(弼善)으로 삼고, 이개(李塏)·양성지(梁誠之)를 문학(文學)으로 삼고, 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을 사경(司經)으로 삼고, 서강(徐岡)·최선복(崔善復)을 정자(正字)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6책 250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왕실-경연(經筵) / *인물(人物)
 
 
문종 2권,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7월 16일(무오) 4번째기사
정갑손·이견기·정인지·이선·성득식·신진보 등을 관직에 제수하다
 
 
정갑손(鄭甲孫)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견기(李堅基)를 우참찬(右參贊)으로, 정인지(鄭麟趾)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선(李渲)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성득식(成得識)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신진보(辛晉保)를 경상도 우도 처치사(慶尙道右道處置使)로, 이승평(李昇平)을 평안도 좌도 도절제사(平安道左道都節制使)로, 마승(馬勝)을 평안도 우도 도절제사(平安道右道都節制使)로, 김수연(金壽延)을 판영변도호부사(判寧邊都護府使)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6책 25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문종 10권, 1년(1451 신미 / 명 경태(景泰) 2년) 10월 6일(신미) 1번째기사
이양·강석덕·유강·
김수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양(李穰)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강석덕(姜碩德)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유강(柳江)·김수연(金壽延)을 아울러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조서안(趙瑞安)경창부 윤(慶昌府尹)으로, 조어(趙峿)를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유지례(柳之禮)를 극성진 병마 절제사(棘城鎭兵馬節制使) 겸 판황주목사(判黃州牧事)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도승지(都承旨) 이계전(李季甸)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말을 가지고 아뢰기를,
“황주 목사(黃州牧事) 유지례(柳之禮)와 강릉 부사(江陵府使) 박효성(朴孝誠)은 나이가 모두 65세이므로 체임(遞任)하여 돌아오면 70세에 이를 것이니, 오래 조정(朝廷)에 벼슬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청컨대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더하여 그 마음을 권장하소서. 또 황주(黃州)는 악질(惡疾)이 일어난 땅이므로 인물이 조잔(彫殘)하고, 또 흉년이 들고, 근래에는 수령(守令)이 자주 바뀌어 고을이 고을답지 않으니, 목수(牧守)를 선택해 보내어 오로지 흥복(興福)하게 하여야 합니다. 유지례는 비록 사양하고 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부임(赴任)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승자(陞資)하여 가선 대부를 주게 되면 성덕(聖德)에 깊이 감복하여 부임하기를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늙었다고 하여 2품을 주겠는가? 유지례는 후일에 다시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특명(特命)으로 승자(陞資)하여 주었다. 임금이 또 일찍이 이계전에게 말하기를,
“지합천군사(知陜川郡事) 조어(趙峿)와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에게 내가 개만(箇滿)2941) 을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화질(華秩)을 주고자 하는데, 후일 과궐(窠闕)2942) 이 있거든 너는 그것을 아뢰어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 장령(掌令)이 결원이 되니, 이계전이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이보흠은 바야흐로 헌부(憲府)의 탄핵(彈劾)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어를 장령으로 삼겠다. 조어는 마음가짐이 청백(淸白)하고 도리(道理)를 지켜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만약 의(義)가 아니면 결코 남에게서 취(取)하지 않는다. 이보흠은 진실하고 정성스럽고 헛된 말을 아니하며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고 조심한다.”
하였다. 임금이 은총(恩寵)을 더하여 주어 그 나머지 사람들을 권장하고자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6책 44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세조 2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8월 19일(임술) 10번째기사
전 중추원 부사
김수연의 상에 조문하다
 
 
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수연(金壽延)이 졸(卒)하니, 명하여 조문(弔問)하고 부물(賻物)도 전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7책 81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중추부사(中樞副使) : 고려 때 중추원사(中樞院使)의 다음으로 정3품 벼슬. 조선 때 종 2품 벼슬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약칭(略稱)한 말.

중추원사(中樞院使) : 고려 때 중추원의 종2품직, 조선 때 중추원의 정2품 벼슬.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 고려,조선 시대 대도호부의 정3품 장관직.

외관직으로 안동·강릉·안변(安邊)·영변(寧邊) 등에 파견되었으며, 기존 지역과 신생 지역의 통폐합이나 승강에 따라 치폐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N       조회
1
조선왕조실록에서 판서공 휘 好仁 2
|5세 이조판서 諱好仁 자료실 감탱이(김기일) | 등급변경▼준회원정회원우수회원특별회원 | 조회 25 |추천 0 |2010.06.17. 22:51 http://cafe.daum.net/sijung-gong/SIdI/2  .bbs_contents p{margin:0px;} 세조..
3228
2
충숙공 휘 수연조의 4군6진 개척
4군 6진의 개척 |4세 충숙공 諱 壽延 자료실 石汝(김기일) | 등급변경▼준회원정회원우수회원특별회원 | 조회 111 |추천 0 |2010.10.08. 23:41 http://cafe.daum.net/sijung-gong/SIdE/11  .bbs_contents p{margin:0px;} ..
3124
3
중시조 시중공 휘 탁
* 中祖 諱 琢 주요 관직) 副使(정5품), 提學(정3품), 知省事(종2품), 大提學(정2품), 정당문학(종2품), 문하시랑평장사(정2품), 都僉議門下侍中(도첨의문하시중,종1품, 현 부총리) 중조께서는 가락국 金首路王을 始祖로 하고 삼한공신 흥무대왕 김유신을 中始祖로 하는 遠孫이시다. 중조의 妃(비)는 진위이(振威李)씨로 찬성..
2835
4
조선왕조실록에서의 金壽延 2
            .bbs_contents p{margin:0px;} 세종 102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2월 10일(경인) 1번째기사 보청포 싸움에서 공을 세운 김한생·조성길·김삼우 등에게 상을 내리다 대호군(大護軍) 김연지(金連枝)가 함길도에서 돌아와 아..
2705
5
판서공 諱 好仁(贈 吏曹判書 行 濟州牧使) 實記
                  .bbs_contents p{margin:0px;} 諱 好仁(贈 吏曹判書 行 濟州牧使)          字는 乃克이요, 號는 秋潭,梅巖이며 吏曹判書(정2품)에 추증 되었다. 公은 1420년 평동 복룡산하 기곡 용강(龍崗)에서 태어나서 암헌 ..
2638
6
조선왕조실록에서의 金壽延 1
        .bbs_contents p{margin:0px;}  세종 63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3월 9일(병술) 3번째기사 문과에서 최항 등 25명과 무과에서 김수연 등 10명을 선발하다  문과에서 최항(崔恒) 등 25명과 무과에서 김수연(金壽延) 등 10명을 선..
2594
7
조선왕조실록에서 판서공 휘 好仁 1
       .bbs_contents p{margin:0px;}  단종 5권, 1년(1453 계유 / 명 경태(景泰) 4년) 3월 5일(임술) 2번째기사 사간원에서 홍윤성의 감찰 제수에 서경하지 않은 이유를 아뢰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홍윤성(洪允成)이 지난번에 사복시(司僕寺)의 직..
2528
8
忠肅公 諱 壽延(同知中樞院使 贈 兵曹判書) 實記
            .bbs_contents p{margin:0px;}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 증(贈)병조판서 충숙공 휘 壽延 實記                        충숙공 께서는  1405년 나주 관동면 복룡산..
2454
9
부사공 김세상 선조 기록(무안군지)
무안군지 무안출신 급제자 명단 (사마) 김적 나주 진사 월강 대경의 후 명종 노몽호 함평 진사 진사성지의 손 김혁 고성 진사 찰제 명의 사 홍진 남양 진사 문정공 언박의 후 노검세 함평 진사 진사 성지의 후 김원 나주 진사 제용점 수남의 자 김세상 김해 진사 호조좌랑 증형판 서간 이천 생원 진사 설의 제..
2414
10
용만공 김우윤 선조 기록
용강공 김우윤(金友尹) 국조방목 기록 세정 - 효검 - 우윤 김우윤(金友尹) ?∼1597(선조 30)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지임(之任), 호는 용만(龍灣)이며 효검(孝儉)의 아들이다. 1572년 별시에서 병과로 급제,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공조좌랑에 오른 후 영광에 거주하는 노비 정세(正世)가 강..
2372
11
현포 김석구(현화문중)
현포(玄圃) 김석구(金錫龜)   1653년(효종 4)∼1718년(숙종 44).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몽뢰(夢賚)이고, 호는 현포(玄圃)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월천리(月天里)에서 태어났다. 중조(中祖)인 신암(愼菴) 김탁(金琢)은 벼슬이 도첨의(都僉議)와 좌시중(左侍中)에 이르렀다. 이름을 남긴..
2316
12
지역 선조(선현) 기록
우리 종중 소속의 각 지역 선조(선현)의 기록을 파일형태로 올립니다.  *참고문헌: 각 군지 및 읍지
2196
1